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북아프리카 전역 (문단 편집) == [[버나드 로 몽고메리|몽고메리]]의 등장과 롬멜의 퇴각 == [youtube(Ikx8UL-G3Vc)] 엘 알라메인을 사수하고 있던 오킨렉 대장은 처칠과 갈등을 일으켜 결국 해임당했고[* 엘 알라메인을 성공적으로 방어했으나 빨리 반격하라는 처칠의 요구를 참모들과 함께 비현실적인 작전이라며 거부했고 이에 처칠은 --승질 뻗쳐서-- 신뢰를 잃었다며 그를 해임했다. 참고:ROMMEL's PANZERS p 236-237 ] 그 후임으로 해럴드 알렉산더 대장이 부임하였다. 더불어 주력부대였던 영국 [[육군]] 제8군의 지휘관으로 고트 중장이 내정되어 있었는데 부임지로 이동중에 독일 공군의 공격을 받아 사망하는 바람에 급히 몽고메리 중장이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고트 중장은 휴 제임스가 조종하는 브리스톨 봄베이에 탑승한 상태로 이동하던 도중 JG 27 소속의 에이스 에밀 클라데에 의하여 격추되었다. 조종사는 엔진 2개가 전부 맛이 간 상태로 어찌 불시착시켰으나 Bf109 두대가 불시착한 기체에 기총소사를 퍼부어 고트 중장을 포함한 탑승자 대다수가 사망했다. 조종사인 제임스는 이때 살아남아서 1965년에 공군 소령으로 퇴역한 다음 2015년까지 살았다.] 당시 북아프리카 전선은 워낙 롬멜이 이름을 날리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장군들이 모두 기피하던 자리였는데, 몽고메리는 롬멜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있었다. 부임한 [[버나드 로 몽고메리|몽고메리]]의 선택은 간단했다. '''"내가 충분한 물량이 확보됐다고 할 때까지 대치 상태를 유지할 것"'''. 그나마 나은 점은 훈련이 잘 된 정규군 전력을 사용하며, 대규모 화력을 동원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준비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심지어는 처칠이 그만하면 충분하니 제발 공격 좀 해서 롬멜을 몰아내라고 애원하는 상황이었는데도 몽고메리는 상큼하게 씹으면서 10월까지 영국과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참전한 [[미국]]에서 배송되어오는 병력과 물자만을 열심히 받아먹고 있었다. --먹보?-- 이 상황에서 다급해지는 것은 롬멜이었다. 결국 더 이상 사태가 악화되기 전에 알람 알 할파 지구를 정면으로 돌파하여 카이로로 점령한다는 작전안을 수립하고 8월 30일 공세를 시작하였으나, 몽고메리가 먼저 공세가 해당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트릭까지 쓴데다가 이런 일을 대비해서 구축한 방어망에 걸리는 바람에 4일만에 작전을 포기하고 퇴각하였다. 10월에 이르자 영국군은 20만의 병력과 1,000대 이상의 전차를 보유하여 전력비를 2:1까지 벌였다. 그러자 몽고메리는 때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여 10월 23일 독일군에 대규모 공세를 펼치기로 결정하였다. 영국 폭격기의 폭격과 대포의 포격과 함께 영국 보병과 전차들이 총공세에 나섰다. 이는 야간에 이루어져 완벽한 기습효과를 달성하였으며 독일-이탈리아군을 혼란에 몰아넣었다. 하지만 혼란에서 벗어난 아프리카 군단은 무사한 방어진지를 거점 삼아 영국군에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영국군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몽고메리의 기본적인 작전방침은 1:1로 맞교환해도 아군이 이득이니 '''닥치고 물량으로 어택땅'''이었고 6,000여명의 사상자를 기록한 끝에 방어선을 돌파해냈다. 이후 연쇄적으로 방어진지가 돌파당했고 독일-이탈리아군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한편 이 당시에 롬멜은 가혹한 야전생활 + 현지의 끔찍한 환경으로 인해 건강을 크게 해쳐서 병을 얻어 독일 본토에서 요양중이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급히 아프리카 전선으로 날아왔다. 롬멜이 여러가지 방안을 강구하며 영국군의 공세를 막으려 하였으나 이미 전황은 아무리 영국군에게 고통을 준 롬멜이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까지 몰려있었다. 히틀러는 "후퇴는 불가하며 현위치를 고수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었지만, 롬멜은 상큼하게 씹고 퇴각을 지시하였고 결국 비관적인 보고가 계속 들어오자 히틀러도 퇴각에 동의하였다. 결국 엘 알라메인에서 퇴각한 독일군은 끝없는 패주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영국군 역시 이 전투에서 워낙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우리가 이긴게 맞는 건가"란 반응까지 나왔을 정도였다([[엘 알라메인 전투]]). 한편 엘 알라메인에서 독일군의 패주가 시작된 시점 미국과 영국 연합군은 횃불 작전을 펼쳐 [[비시 프랑스]]의 [[식민지]]인 [[모로코]]와 [[알제리]] 해안에 10만 7천명에 달하는 병력을 상륙하였다. 이 무렵 독일-이탈리아군은 트리폴리를 거쳐 [[튀니지]]를 향해 철수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반대쪽 방향에서도 연합군이 진격하는 셈이라 [[추축군]]에게 쐐기를 박은 격이었다. 하지만 후퇴로 인해 보급거리가 다시 줄어든데다가, 이탈리아에서 더 가까운 프랑스 식민지인 튀니지를 독일군이 무력으로 점령하면서 순간적이지만 다시 보급이 대량으로 진행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추축군은 튀니지의 한 귀퉁이에서 상당기간 저항할 수 있었고, 전쟁경험이 없는 미군을 대차게 바르긴 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진 판... 상황이 이쯤 되었을 때 롬멜을 비롯한 북아프리카 군단 수뇌부는 독일판 뒹케르크 철수를 히틀러에게 관철시키는 것이었고 롬멜도 가우제도 히틀러에게 철수작전을 건의했다. 하지만 우리의 총통은 역시 철수에 발광하며 거부. || [[파일:8040fda455f842b3faa5cd74f36969a7.jpg|width=100%]] {{{#000 [[튀니지 전투]] 당시 [[3호전차]]N형}}} || 결국 롬멜이 포로로 잡히는 사태를 원치 않았던 수뇌부는 롬멜을 본토로 소환하였고 한스위르겐 폰 아르님 육군 상급대장이 지휘를 계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전세는 완전히 기운 상태였고, 결국 야금야금 방어선이 축소된 끝에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추축군은 완전히 소멸되었다([[튀니지 전투]]). 이로 인해 몽고메리는 높은 평을 받았지만, 상징적인 목표무로 삼아 그토록 노리고 노리던 롬멜의 지휘차량 맘모스만은 끝내 얻지 못했다. 폰 아르님 장군이 롬멜 장군이 귀국하며 인계해 준 맘모스를 항복 직전 소각해 버렸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